“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12절)
사람들은 사망과 생명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오늘날만이 아니라 아담의 시대부터 계속되어왔습니다. 그것을 요즘에 더욱 느끼는 이유는 질병의 세계적인 만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믿음을 전하고 믿음을 자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혹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기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자신들의 구원과 복을 추구하고 감사하다보니, 그 모습이 남들에게 좋아 보이지 않았던가봅니다. 세상을 향해서 자중하며 조심의 자세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의 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을 두고 질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믿음의 사람들을, 질그릇에 보배를 담아 가진 이들로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주려는 행위가, 예수믿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믿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이미 받은 믿음의 사람과 생각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서로의 적대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만하지 말고, 불신자는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비난과 박해를 당하는 처지에 있어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낙심하거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참된 신앙은 오뚝이 같은 인생을 만들어줍니다. 오뚝이의 원리는 무게중심에 달린 문제입니다. 큰 원구의 아랫부분에 무게중심이 있음으로 무조건 넘어지지 않는 것이 오뚝이입니다. 그리스도가 인생의 무게중심에 계시면 그는 언제라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도록 놓아두어도 곧 일어나 똑바로 서게 됩니다. 인생의 무게중심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삶의 모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것으로만 본다면 무게중심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성공을 의미하는데, 무엇으로 성공하든 사람들은 성공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공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성공하게 한 그것에 따라가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무게중심이 무엇일지 신중하게 선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는 바울 사도의 말에서 그 답을 찾아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한국이 방역에 성공했었으나 재발하여 피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암담하기가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병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치료제도 백신도 아직 개발되지 않아서 명확한 대처방안을 보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숨조차 편히 쉴 수가 없고,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고서는 나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이 정도가 되었으면 가히 세상 종말이 온 게 아닐까 여겨집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겠지요. 단 한 시간의 종말을 앞두고서라도 의연하게 오늘의 임무를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처세방법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알 것은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종말의 위기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현실상황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말한 분석은 사망과 생명입니다. 그 둘은 극단적 대조의 상황을 일컫는데, 그 두 가지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는 말씀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이고 너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을 뜻하고, ‘너희’는 예수의 생명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 ‘너희’나 결국은 동일한 대상입니다. 영적 어둠이나 육체적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은 우리 모든 사람 앞에 닥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과 두려움이 예수 생명을 가진 자를 정복하지는 못합니다. 예수의 영이 건강과 평안의 품에 나를 감싸시기 때문입니다.
(2020년 6월 21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