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장 4절)
지난 2월 26일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4월 12일(부활절) 전날까지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종려주일은 상반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와 예수를 대적하고 핍박한 무리는 서로 다른 이들이었으나, 결국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를 대변하는 인생입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조건을 내세워 사람의 종류를 구분합니다. 그렇게 구별하는 것이 대체로 편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 또는 부산 사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부자와 가난한 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런 식의 나눔입니다. 그런 구분법이 나름대로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통계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웬만큼은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나름대로 효과적인 이해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조심스럽게 경계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 영혼은 조건이 무시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복을 받은 위인입니다. 그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서울 사람이거나 부산 사람이거나, 어른이나 아이나,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그런 어떤 것이라도 존중과 비 존중의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전능하신 성 삼위 하나님의 성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범하고도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53:2)고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보통이라도 됐을 텐데,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아 많은 고난을 겪기까지 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결국은 십자가 형틀에서 죽음의 처형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 가도록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왜 그렇게나 극단적인 입장에 놓여야만 했던가? 거기에는 예수 구원과 믿음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 그 내막을 모르는 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극단의 고난은 사람이 받아야 할 슬픔을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과 슬픔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세상살이를 하루라도 했고 생각할 줄 아는 이라면, 슬픔과 고난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배고픔과 먹는 즐거움 그리고 건강유지를 위해서 음식을 섭취하지만, 먹음으로써 배설하고 성장하여 늙고 때로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며 죽음에 도달합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이 곧 인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의 관점에서는 남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 영적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그가 인생의 슬픔과 질고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고통은 사람들이 원래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은 추가적으로 주어진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가장 못난 인간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기를 합리화 하는 자는 아주 나쁜 놈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늘 시끄러운 이유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듯이, 모든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까? 인생의 질고를 대신하기 위하여 그 분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림과 상함과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평화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기회를 잡는 행위입니다. 미련한 양처럼 돌아다니는 인생들이여,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 안에서 생명의 안전을 얻읍시다.
(2020년 4월 5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