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잡으려 하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세기 22장 10절)
추수 감사 주일은, 한 해 동안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는 예배의 날입니다. 믿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감사를 아는 분이었습니다. 현대인은 감사 표현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차하면 불평의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로써 그들의 감사는 결국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아브라함이 실행으로 보인 절대적 감사입니다. 제물로 아들을 드리기까지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감사가 무엇인지 배운다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헌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적을 놓고, 흔히 상반된 견해로 대립합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누군들 수용할 수 있겠는가? 절대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은 이론적으로 결론을 내릴 만한 단순한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명하셨고 아브라함은 이의 없이 순종하였으며, 아무런 부작용 없이 원만한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완전한 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육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명령이 귀에 들릴 리 없고, 더욱이 순종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고 명령을 들으며,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확인시켜 주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상태를 하나님이 몰라서 그렇게 하셨던 게 아니라, 순종을 통한 복을 확인시켜 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理性的)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적인 역사는 신앙과 이성(理性)의 대립 가운데 이어져 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신앙은 이성의 부면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을 이성 속에 가두어 놓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 이성을 만드셨으나 이성을 초월하여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그 모든 목적은, 인간의 깨달음과 축복입니다.
사람의 염려는, 번제로 드릴 제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목적과 목적지 그리고 제사의 행위자는 확실히 정해져 있는데, 제물이 안 보였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사실인즉, 제물은 아들 이삭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물은 하나님께서 이미 따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답했습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봄으로써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로 아들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행위를 제지하였습니다. 참으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다급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또한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하거나 불의한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모든 것을 감사로 수용하려 합니다. 세상에 오셔서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가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안다면, 어떤 일에나 원망할 수 없고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거나 헌금 내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는 교인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구주 예수를 믿고 섬기는 이들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말하기 곤란합니다. 헌금을 요구해야만 마지못해 시늉하는 교회의 현실은, 보기에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 주일이라고 해서, 헌금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워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육의 완전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22년 11월 20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