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상(上)+율악(栗岳)으로 잘못 음차된 웃바매기오롬

쿠노Koonoh 2023. 5. 26. 07:24
뉴제주일보 승인 2023.05.25 19:12
웃바매기오롬
서쪽에서는 본 웃바매기오롬. 오롬으로 가는 메밀밭 둑 길에 들꽃이 피어있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쭉 뻗은 번영로를 향하여 가는 중에 거문오롬 4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내비게이션으로 ‘웃바매기’라 하고 찾아갔지만 팬션이었다. “저기 보이는 오롬이 웃바매기지만 이리로는 갈 수 없습니다”고 한다. 지난겨울에 알바매기 쪽에서 찾아가다가 날은 어두워지고 차는 습한 자갈길에 빠져 고생하던 기억으로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웃바매기로 가는 길은 알바매기 기슭의 조경수판매점인 <행복한조경>점 앞의 비포장 좁은 길에서 들어가야 한다. 일반 승용차라면 길 입구에서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는 게 좋을 것이다. 비포장 길인 데다 양쪽 바퀴 쪽이 낮은 데, 오히려 가운데가 높은 자갈길이라서 차가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겨울보다 길이 좀 나은 것 같다.

웃바매기는 이번에 세 번째로 방문이다. 자갈길을 다 가니 이번 비에 씻겨 내린 듯한 붉은송이(화산흙)가 비탈길에 쭉쭉 칼자국 같이 그어 놓았다. 이윽고 아스팔트 길에서 칠팔백 미터나 걸었을까, 만여 평 너머 보이는 크고 넓은 밭에 너울지듯 펼쳐진 메밀밭이 이제 막 싹을 내고 있었다. 아마도 메밀꽃이 피면 또 하나의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알바매기·서西쪽에는 웃바매기, 동東쪽을 향하여 가는 메밀밭 뚝에는 보랏빛의 백리향 닮은 들꽃이 수북하다. 눈앞 동東쪽에는 웃바매기오롬, 남南쪽으로는 메밀밭 너머로 멀리 한라산으로 줄줄이 맥을 이어 오르는 오롬들, 북北쪽 넓은 풀밭에는 고삐를 메지 않은 말들이 뛰논다. 영주십경瀛州十境(제주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고수목마라 할만한 제주말들이 자유롭다.

조금 더 가니 울창한 삼나무들이 높푸른 데 철조망 너머 웃바매기 오롬으로 가는 길은 없다. 삼나무 아래로는 천남성과 양치식물(관중고사리), 중간지대로는 어린 담팔수·참식나무들이 가끔 푸르다. 동북쪽으로는 돌담만 남은 옛 집터가 보인다. 4.3사건 때까지는 사람이 살았음 직하다. 조금 더 가니 물터가 보이는데, 샘 솟는 물이 아니라 세미오롬 같이 고인 물이다.

푸른 목초밭 넘어로 보이는 웃바매기 북쪽 봉우리.

동쪽 정상을 향해서 삼나무 숲을 가로질러 지나는데 자연석이 아닌 깬 돌로 산담(墓石)을 쌓은 큰 묘가 보인다. 걸음을 돌려 비석을 모두 읽어보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들로 호장戶長, 병조좌랑兵曹佐郎(비석에 조‘曹’자는 빼진듯),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판관戶曹判官, 병조정랑兵曹正郎 등의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제주에서는 보기드문 명문가로 보인다.

위로는 ‘가선대부 호조참관(嘉善大夫 戶曹參判) 김해김공검지묘(金海金公儉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김해김씨 묘지 위로는 길이 없는데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지는데 지난 계절에 쌓인 낙엽과 진 이슬, 푸른 잡초 들로 인해서 몇 번 미끄러지며 정상을 오른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이미 나뭇가지들에 막혀 전망이 없고 서쪽으로는 알바매기가 비 갠 하늘에 진록 빛이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이르러 알바매기와 웃바매기를 상율악上栗岳, 하율악下栗岳이라고 표기한 것이리라. 이 오롬을 알밤(밤나무 열매)로 말하는 것은 웃으운 일이다. 이 오롬들은 알下+바매기, 웃上+바매기이지 ‘알밤+매기’가 아니다. 이는 단지 제주어를 지도에 표기할 때 제주인들이 부르는 이름을 한자로 잘못 표기한 것을 아무 뜻 없이 부르는 것은 제주인의 수치다.

앞서 오롬을 해석한 이들이 이를 ‘밤오롬이다’, ‘밤을 닮았다’는 해석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렇게 틀린 제주오롬들의 명칭·유래·어원들이 도정부·오롬안내판·관광책자 등에 쓰이고 있다. 또한, 오롬에 대하여 안다고 방송에까지 출연하여 이런 얘기들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게 옳은가? 설령 틀렸을지라도 자기가 연구한 바를 말하는 게 옳지 않은가?”

바매기(알바매기·웃바매기)오롬에 대한 해석은 본지 오롬스토리 51회차(알바매기오롬)에 이미 해석한 바가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고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동쪽 정상으로 오르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오래된 고사목들이 꽤 보인다. 언젠가 알바매기에서 제주산 크낙새가 “크나~악 크나~악” 하고 운다. 산이 깊고 고사목도 많으니 이 지경에는 크낙새와 딱따구리가 텃새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꿩소리 말고는 듣지 못했는데 ...

교래자연휴양림(지그리오롬)과 선흘동백동산에서 보이던 산목련은 이미 넓은 잎이 되었고 윤냥(鐘木/때죽나무)·산딸나무·고로쇠나무도 이미 잎을 피웠는데 굴피나무는 이제야 붉은 빛으로 잎이 푸르러진다. 하얀(미)색의 국수나무꽃들이 띄엄띄엄 피었는데 한 그루 갈매기난초가 보인다. 들판에는 종달새소리, 숲에는 뻐꾸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처량한 제주의 봄날이다.

4·3사건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음용했을 물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