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몬뜨그락헌 오롬은 몽골어 안친(АНЧИН·사냥꾼)이다

쿠노Koonoh 2025. 2. 10. 10:11
 삼다일보 승인 2025.02.06 17:42
흰눈이 내린 안친오롬 북쪽.
 

제주 중산간 송당리에 작고 요망진(야무진) 오롬이 있다. 가을이 오면 서남쪽 언덕에 스크렁이 물결치고 만추에는 황새풀이 우거진다. 동북쪽으로 개간된 언덕에는 보드라운 목초가 푸른 비단처럼 미끈하다. 안친오롬은 일주동로의 구좌읍 평대리에서 한라산 제1횡단 도로까지 이어주는 비자림로변 송당리 초입에 숨겨 있어 좀처럼 들어내지 않는 오롬이다.

반대로, 알(아래) 송당에서는 로터리를 돌아서 평대리로 나오는 길에서 100m쯤 되돌아오는 길에 안친오롬이 있다. 송당리 808, 812번지에 있는 이 작고 고운 오롬은 낮은 언덕과 얕은 구렁으로 이뤄진 미개방 사유지 오롬이다. 송당 마을에서는 마을 소들을 들판으로 나가고 들어오기 전후에 쉬어가기 좋음 직한 곳이다.

안친오롬 서북쪽의 푸른 목초는 봄바람이 불면 휘날리는 푸른 치맛자락이 나부낀다. 서남쪽으로는 돌무꽃의 보랏빛 블라우스가 한들거린다. 늦은 가을, 목초가 베인 안친오롬은 누런 벌판이더니 돌담을 따라가노라면 수줍은 비바리 몸매를 보는 듯 아련하다. 삼사 년 전에는 피(곡식)가 허리까지 차올랐다. 서남쪽 끝 돌담으로 돌아가면 키 큰 후박나무, 참식나무, 팽나무 사이로 몰쿠시(고령근)·천선과·팔손이 등이 틈틈이 자라서 바람들 곳이 없어 보인다.

이 오롬은 산간마을 송당리 알뜨르에 있는데 해발 192m이나 실제 오롬 높이인 비고는 22m, 둘레도 고작 924m로 1㎞ 채 안 되고, 면적 46.443㎢로 높지도 크지조 않은 언덕 같다. 길 쪽은 밭담이 둘려있고 주차장도 없으니 어디에 오롬이 있는지 찾기조차 어렵다. 그렇지만 이 오롬은 작아도 어엿하게 스코리아 화산 분석구를 가진 말굽형 오롬이다.

스크렁이 물결치는 안친오롬 남동쪽.

필자는 안진오롬이 순수한 제주어로 알았다. ‘아진’은 제주어로 ‘앉아 있다’라는 수동사이며 ‘안친’은 ‘누군가 앉혀놓았다’라는 타동사로 알고 있었다. 깜빡했으면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 오롬은 북향으로 열린 굼부리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다리를 벌리고 편안히 앉아 있는 비바리 모습 같아서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한자로 아친악(雅親岳)의 ‘아(雅)는 이쁘다·우아하다’라는 뜻이고 ‘친(親)은 친하다·가깝다‘는 뜻이다. 중국어로 편지 쓸 때 서두에 ‘친아이더(親愛的)’라는 말은 연인이나 아내에게만 쓰이고 친구·가족에게도 잘 쓰지 않는다. ‘아친악(雅親岳)’은 제주어 ‘아진오롬·안친오롬’의 음차로 보이고 ‘좌악(坐岳)·좌치(坐置)·좌치악(坐雉岳)은 한어(漢語)로 ‘앉았다’라는 뜻의 ‘앉을 좌(坐)자’로 쓰였다.

그러나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안친(АНЧИН)’은 몽골어로 ‘사냥꾼(포수·砲手)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사전적으로는 ‘총으로 짐승을 잡는 사냥꾼’. ‘포병대에서 대포를 직접 발사하는 병사’, ‘총포를 가진 군사(총군·銃軍)’를 말한다. 안친오롬은 두 다리 벌리고 편안히 앉아 있어서 처자의 둥그런 뒤태(방뎅이)를 닮아서 봉우리라 할 만한 곳도 없으니 눈이 쌓이면 눈썰매장으로 쓰기에 딱 좋은 곳은데, 해발은 192m이나 비고는 고작 22m이다.

추분을 앞둔 안친오롬에는 ‘스크렁이 깔렸다. 스크렁은 벼과 식물로 30~80㎝로 8~10월에 ​흑자색 동그란 이삭이 달리는데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꽃말이 있다. 진晉나라왕 위무자가 병 들자 아들(위과)에게 “나의 사후에 후처(위과의 서모)를 개가시켜 순장(殉葬)를 면케 하라”고 유언하나 병세가 악화하자 “후처를 순장하라”고 번복한다. 위무자는 부친 사후에 서모를 개가시킨다. 그 후, 진환공(秦桓公)이 진晉나라를 공격할 때 노인은 적군의 앞길에 풀을 잡아매어 두회가 탄 말이 걸려 넘어지게 만들어 적장 두회를 사로잡고 승리한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자신이 바로 위과가 재가시킨 서모의 애비로 딸을 구해 준 은혜를 갚으려고 싸움터에서 풀을 묶어 두회가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Daum 백과 고사성어대사전)

가을 채비를 서두르는 들판은 가을 향연을 준비한다. 안친오롬의 가을은 단풍도 없고 다만 스크렁과 황새가 물결칠 뿐이다. 뜨겁던 태양의 열이 빠지고 산들바람이 불면 안친오롬 언덕에 가을이 온다 했더니 벌써 겨울이다. 숲도, 가시덤불도, 깊은 골도, 돌과 바위도 없으니 안친오롬이야 말로 더할 나위 없는 사냥터요, 포수들의 땅이었을 것이다. 안친오롬은 몽골시대처럼 지금도 몬뜨그락(빤들빤들한 대머리 같은) 민오롬이다, 국제사냥대회가 제주에서 열리는 것도 이처럼 사방이 확 트인 최고의 사냥터였으니 당연히 안친오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