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9편 12절)
여호와의 율법과 교훈과 계명은 완전하고 정직하며 순결합니다. 그에 비하여 사람은 불완전하고, 삶은 온갖 허물에 싸여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상반된 모습에 대한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많은 교인들도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이론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食傷한 신앙모습이 이 시대에 더는 적합하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사실상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이 영원한 반면에 사람의 불완전함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불완전과 허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선해지고 완전해지려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호와를 바라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만한 채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춘기 소년이 부모 말씀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어가고 부모나 선생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한지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눈물을 흘리며 철없던 시절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모님께 직접 효도하기에 때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저지르는 과오와 후회는 어찌할까요? 우둔한 인생이 지혜로워지는 방도는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없이 사는 한 외롭고 슬프며 순결하지도 못합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고독과 슬픔의 그늘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많은 세파에 시달려서, 그는 메마르고 상처 난 정서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우하게 자란 이들은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 실망, 낙담은 때로 범죄와 죽음의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실상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바라는 것은 정욕과 허무라는 두 부류 중 어느 한쪽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지혜가 없는 사람의 시야는 육신의 안목에 따른 범주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6)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정욕은 다함이 없는 수렁과도 같이 사람을 이끌어갑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도 끝끝내 만족할 수 없는 게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허무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 마약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미모의 한 젊은 여성이 상습적인 마약 투약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간절히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끊지 않는 한, 너는 죽고 말 거야.” 그러자 그녀는 힘없이 대답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한 번만 더 맞고 싶어.” 얼마 후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침대에 누인 그녀의 뽀얀 팔뚝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가득했습니다. 남자는 매일 장미 한 송이를 그녀의 묘지석 사진 앞에 올려놓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지혜로워지고 순결한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 같은 주님이십니다.(아2:1) 사람의 영혼 속에 사랑의 꽃으로 피어나는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그를 구주로 믿고 사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완전한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복을 누리도록 하려고, 주님은 우리를 모든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죄는 흉한 모습으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쌉니다. 罪의 性向을 소홀히 무시한 채 평안과 자유를 주장하는 신앙이란, 사실상 자유주의의 불신앙입니다. 예수가 사랑과 평화의 주님이시라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예수는 인생의 죄를 없애려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 사랑과 평화를 만들어갑시다.
(2020년 8월 9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