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장 10절)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거듭나기 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인재로서 열정 가운데 훌륭하게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완전히 변화한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을까, 의아해할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렇게도 신비스럽습니다. 지구상에 예수의 복음이 전파된 역사를 생각해보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전한 복음이 내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본문이 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놀라운 변화와 사도로서의 임무수행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미로 말하는 것 같지만, 정확한 개념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성경이 보여주는 의미를 벗어나 주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예수는 聖父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는 사람의 죄를 속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악한 세대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인 아닌 사람들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유대인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의 자유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율법을 따라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을 퍼뜨렸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그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그들이 해치려 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궤계로 벌어진 혼란의 상황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심정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허탄한 심정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1:6)고, 그는 표현했습니다. 또한 다른 복음이란 아예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것이 저들의 목적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단의 세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끈질기게 극성을 부립니다. 이단사설은 드러나는 경우도 있거니와, 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단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공익을 위한 이론을 내세우고 사업을 벌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한 구원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기 전에 가졌었던 생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사울(바울)은 목숨을 걸만큼 유대주의가 옳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겪었던 과거의 어리석음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심령을 지금 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사람이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단을 전하는 그들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악의를 품고 말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배하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큰 죄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저주의 말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최대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지녀야할 중요한 결론으로,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무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는 이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그 답을 굳이 들어야 아나요? 사도들과 그 후예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조차 기꺼이 바쳤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그동안 얼마나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020년 8월 30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