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민수기 20장 13절)
만유 주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거룩함’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자(聖子)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사람과 친밀한 위치에 계셨습니다. 친밀하면 위엄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모름지기 가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함의 의미가 사랑과 은혜의 이미지에 흡수되어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구약성경에서 누누이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거룩함이 손상되면 징계와 파멸이 엄히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노정에서 있었던 ‘므리바 물’의 사건은 상당히 유명합니다. 사람들의 죄 가운데 중대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원망은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원망은 매우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면 원인을 알아내어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원망부터 앞세우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먹을 물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부터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원망부터 하는 게 그들의 못된 버릇으로, 그것은 복 그릇을 뒤엎는 어리석은 태도였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현대 신학과 그에 따른 신앙 태도의 특징은 하나님과 사람의 동류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이것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나무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안에 거하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유기적 관계는 나의 영혼을 생존시켜주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이론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신 로고스라는 중대한 사실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육신(成肉身)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절대적인 의와 위엄과 은혜로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한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해줄 만한 상황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킨 행위였습니다. 합리적 이해보다도 앞서 중요한 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믿고 따르려는 자세입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따르려는 절대적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다투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다툼으로 하나님의 ‘위엄’에서 오는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실 게 없다고 원망하자,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두렵게 생각할 줄 아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백성들의 물을 달라는 요구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게 하심으로 물을 주셨습니다. 그 광야에서 물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고, 따라서 물을 요구한 자체도 잘못이 아닙니다. 단, 믿음 없이 원망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케 한 게 그들의 잘못입니다. 믿음 가운데 순리적으로 요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물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것저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순종하는 게 최대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한없이 은혜로우시지만 엄위하게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 모세와 아론조차도 대충 용서받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행위도, 우리가 보기에는 뚜렷한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의 잘못인즉, ‘~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편안하고 의연한 믿음의 자세를 백성에게 보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던 구레네 시몬의 순종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순종은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2021년 9월 26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