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복음 7장 42절)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받으셨으며, 결국에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시합니다. 바리새인은 대접하려고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지만, 불행히도 그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몰랐고, 더욱이 예수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여인과 바리새인은 대조적 인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전해줍니다.
바리새인은 식사 접대를 명분으로 예수를 초대했으나, 그의 목적은 예수를 떠보아 무언가를 책잡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에 얽매인 모든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호의로 대하는 척하면서 약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남의 약점을 잡아 이용함으로써 자기의 위세를 보이고 어떤 이득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행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신명기 22장 8~11절의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말라, 소와 나귀를 엮어 밭을 갈지 말라, 양털과 베 실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말씀은, 부자연스러움을 지양하고 순수성을 요구한 말씀입니다. 신앙 태도에서나 인격적 판단 또는 삶의 의도와 행동 등의 모든 부면에서, 우리는 순수성을 지키도록 힘써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바리새인의 집에 온 여인은 동네에 공공연히 알려진 죄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창녀로서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와 구원을 간절히 기대하였습니다.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는 바리새인은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해도 불가능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을 향해, 빚을 탕감받은 두 사람을 예로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빚을 많이 진 자와 적게 진 자가 각각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다면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고, 예수님이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정답은, ‘탕감을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시몬은 올바르게 대답하였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시몬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는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랐고, 따라서 그를 올바르게 접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예법에서는 손님이 오셨을 때 발 씻을 물을 내놓아야 합니다. 시몬의 예의 없는 태도에 비해, 여인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이 받은 선물은 죄 사함이었습니다. 집주인인 시몬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여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그러한 상황은 일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기독교회 안에서도 대조적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얼른 들으면, “그게 무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교회 안팎을 불문하고 이해가 전혀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려면, 죄 사함을 받은 여인의 경우를 반드시 공감토록 해야 합니다. 예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죄인입니다. 자기의 삶과 내면에서 죄를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믿음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는 예수를 접대할 수 없으며 평안의 길을 걸어가지도 못합니다. 깊이 죄 사함을 받은 자일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2021년 10월 17일,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