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섭섬 앞 보목리 서남쪽에 있는 전설의 절오롬

쿠노Koonoh 2022. 7. 31. 16:40
뉴제주일보 승인 2022.07.21 19:00 
희귀식물 석위와 조선조 25망대 중 고촌망대가 있던 오롬
절오롬은 서귀포 동쪽 바다에 바로 접해있는 해안오롬이다.
 

50년 전, 공천포와 색달리가 고향인 두 친구와 서귀포에서 세 달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다. 휴일이면 보목리 포구에서 낚시를 했었다. 색달리 친구가 “지귀도까지 30분이면 헤엄쳐 왕복한다”라고 호언에 공천포 친구는 그러면 “내가 절오롬을 15분이면 왕복한다!”라고 장담하던 목소리가 생각난다. 절오롬은 15분에는 어려워도 30분이면 왕복할 수도 있는 크지 않은 오롬이다.

50년 전, 파초일엽도 본 듯하나 보이지 않는다. 일엽초는 잎자루 하나에 한 잎인 고란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다. ▲일엽초 부류인 석위는 세뿔석위·창석위·우단류 등인데 한천민 선생은 이를 ‘외뿔석이’라고 하여 사전에는 없으니 연구하여 밝혀야 한다. 곳자왈에는 (세)뿔석이는 많으나 절오롬의 석이는 옅은 초록색이고 잎이 얇아서 달라 보인다.

석위는 만성기관지염·만성신우염에 관련해 효과가 인정됐다. 이러한 약성은 국내산 50g에 3만5000원, 해외 수입품은 500g에 6만원씩 거래된다. 또한, 분경으로 애용되며 도체·약탈당해 파초일엽은 오래전 사라진 것 같은데 일엽초(석위)도 언제 사라질지 염려스럽다.

탐방로 계단 위에 노란 방울이 보여서 살펴보니 비바람에 떨어진 천선과다. 주위에는 천선과·사스레피·후박·참식·곰솔 등의 키 큰 나무 아래 백냥금, 그 아래는 털머위가 가득하다. 중턱쯤에 이르니 한 무리 참나리꽃과 노란색 원추리가 여름의 절정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정상에서 보니 서남쪽은 섭섬(숲섬), 그 너머 문섬(민섬)과 서귀포 항구, 더 멀리는 법환리 앞바다 범섬(호도)까지 일직선으로 박혀 있다. 중문 쪽은 보이지 않는데 굴오롬(산방산)은 확연히 우뚝하다. 서귀포 앞바다에는 푸른빛 언덕처럼 새섬이 보인다. 필자가 청년 시절 서귀포~부산 간 여객선 이등기관사로 승선할 때 배에서 새섬까지 헤엄쳐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오롬 동쪽 오솔길로 돌아가면 공천포 앞바다와 지귀도가 보인다. 정상의 키 큰 곰솔은 아름드리로 재보니 둘레가 2m쯤이다. 샛길을 더 가니 수직으로 뚫린 굴 같은 게 보인다. 아마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들이 모슬포 공군기지로 나가는 적기를 격추하려고 고사포를 설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빽빽한 나무들이 길을 막는다. 50년 전, 망동산같은 매끄러운 곳에서 어린 애들이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탐방로는 2000년을 맞으며 보목리 청년회가 처음 개설했다고 한다. ▲필자는 아이들이 타고 놀던 ‘망동산 같은 곳’이 조선 시기 고촌(孤村)망대로 본다.

조선시대 제주는 삼성(제주목·정의현·대정현), 9진(화북·조천·별방·애월·명월·차귀·모슬·서귀·수산)과 25봉수가 있었고 그 봉수에 속한 연대는 그 아래 들판·마을·해변에 있었다. 그 예로 제주목 입산봉수는 삿갓오롬에, 연대는 김녕마을 입두·무주(월정)·좌가(한동)에 있었다. 정의현 지미봉수는 지미오롬, 연대는 종달에 있었다 필자는 이를 두문포 바닷가 언덕으로 본다. 

절오롬 정상에서 남쪽으로 보면 섭섬 문섬 범선이 일직선상에 있다.

정의현 서쪽 서귀진 삼매양(삼매봉)봉수, 동쪽은 자배(조배오롬)봉수, 남쪽에는 고촌봉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촌봉수터는 아직껏 밝혀진 바 없으나 그곳이 바로 절오롬이고 고촌에는 봉수가 있었고 연대들 중 하나가 보목으로 나타난 것을 볼 때, 필자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①고촌봉수(절오롬) 직할연대 중 보목은 산 아래 있다. 이는 성산봉수-오조연대, 지미봉수-종달연대처럼 고촌봉수-보목연대도 같은 이치다. ‘고촌(孤村)은 제주어의 한자표기(음차)다. 1981년 서귀읍·중문면이 병합해 서귀포시가 된다. 이때 보목리는 토평, 동홍리 일부를 합쳐 송산동이 된다. 보목은 옛부터 ‘볼목리’로 알려진 고촌(古村)이다. 정술내(보목천, 쇠소깍) 하류는 고인돌, 검은여 바닷가(ᄀᆞ막곳) 인근은 고려-조선시대의 갈색토기가 발견된 고촌이다.

②절오롬은 원추형오롬으로 정상에는 지금도 둥그렇게 솟은 봉수터가 있다. 이는 필자가 조사한 정의현 7개 봉수들 중 지미오롬(종달/指尾烽)·물뫼(성산/水山烽)·독오롬(신산/獨子烽)·돌오롬(표선/達山烽)·톨오롬(토산/兔山烽)·조배오롬(위미/資盃熢) 등의 공통된 모습이다. 지금은 봉화대 주변에 운동기구가 둥그렇게 설치된 그 중심지가 곧 고촌봉수터로 보인다.

③봉화 간에 거리로 볼 때도 김녕(구좌읍)-종달(구좌읍)-고성(성산읍)–신산(성산읍)-남산(천미천=표선경계)-토산(표선면)-위미(남원읍)-보목(정술내=남원/서귀경계)-삼매봉(서귀포)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거리 분포도 대략 비슷한데 한 읍면에 두 곳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절오롬 남사면 중턱에는 ‘자연 굴이 있는데 그 시기와 절 이름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은 조선조 이전까지 이 절은 ‘산방굴사’처럼 ‘볼목굴사’였을 것이다. 이 절은 주전 시기 발타라존자가 인도에서 제주도에 포교하여 생긴 남방불교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제주목사 이형상은 승유억불정책으로 절과 당을 폐쇄할 때 이곳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절오롬’의 절(암자)은 사라져도 그 ‘굴사(窟寺) 자리’에서 동네 사람들은 굴을 찾아 소원을 빌거나 심방(무당)을 청하여 무속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역사적 추리로 볼 때 ‘절(지기)오롬’과 ‘제지기오롬’은 유관하나 전혀 다르다. 하나는 불교적 ‘볼목굴사窟寺(절)’이고 하나는 무속의미의 ‘제지기’이다. 그런데 절, 또는 절을 지키던 사람이 있어 ‘절지기’라는 말은 터무니없다.   

조선조 고촌봉수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필자는 오롬 정상에서 미끄럼타던 곳이 ‘제주도 25개 망대 중 하나인 ‘고산봉수가 있던 망동산’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처음 밝힌다. 당국은 이를 파악해 놀이터를 없애고 역사적인 망대로 복원해 새롭게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