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수염고래 전설과 입산망대 터인 삿갓오롬

쿠노Koonoh 2022. 9. 11. 23:02
뉴제주일보 승인 2022.08.04 19:00
김녕 마을 어귀, 문장봉과 뒤집은 삿갓 굼부리오롬
삿갓오롬 굼부리에서 본 봉화대가 서 있던 문장봉과 연꽃이 피어나는 문장지(연못).
 

삿갓오롬의 모양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해 삿갓오름 또는 입산봉(笠山峯)이라 불렸다. 이 오롬은 김녕버스정류소에서 동남쪽 시멘트포장 길을 따라가면 ‘김녕리 공동묘지’ 입구에서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직진하다가 금산농장이 보이면 거기서 좌회전해 삿갓오름의 등성이 둘레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괴살미·김녕마을·김녕바당이 눈 아래로 보인다.

 ▲둘레길 입구에 ‘김녕·월정 지질트래일’ 표지판은 색 바래어 누워 있으니 유명하지만 찾는 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삿갓오롬은 한라산 368개 기생화산 중 하나로 이 오롬은 폭발 당시에 둥그런 원형분화구를 만들며 작은 용암 부스러기인 스코리아가 화구륜으로 쌓여 퇴적된 것이 오늘날 분화구를 감싸고 있는 둥그런 굼부리(분화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삿갓오롬 높이보다 분화구가 큰 것은 수중분화로 만들어진 응회환이 수중폭발 한 거라는데 필자의 둔한 생각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김녕 앞바다의 두럭산(水中山)이 폭발하며 이곳으로 삐져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수중화산의 폭발이라면 멀미오롬, 절워리(송악산)같은 화산날개 절벽들이 보일 텐데 없다는 것은 두럭산이 그러리라 생각됐다.

삿갓오롬 입구 쪽으로는 자연 침식이 이루어져 점차 변형이 이루어졌으나 원형분화구 형태는 잘 유지되는 듯하다. 그러나 등성이의 둘레 길은 잡초밭이고 조금 더 가자 한 아름 넘는 큰 곰솔과 반대편 산벚나무 아래 ▲‘입산봉수터’라는 표지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제주도에서는 이런 곳의 봉수터는 본 적이 없으나 이에 관해 물어도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수소문해 굼부리 안의 ‘금산농장주’를 찾았다. 농장주 김두전씨는 80세 중반 나이로 필자가 전화하자 “만나서 얘기하고 자료도 주겠다”고 해서 식사를 대접하며 입산봉수와 금산농장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소개받았다. 김두전씨는 입산봉수터는 지금 표지석이 있는 곳(북향)에서 이삼백 미터 떨어진 문장봉(북동향)에 있는데 “표지석을 옮기라”해도 말이 없다고 한다.

제주도 여름, 모래사장이 있는 곳들은 멸치어장이 형성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멸치 떼를 통째로 삼키는 ▲대왕고래(수염고래亞目)의 출현이다. 함덕-성세기(김녕)-월정(무주포)-세화리가 그렇다. 월정에서는 “멜들민(멸치들면) 월정, 멜어시민(멸치 없으면) 멀쩡”이란 구전도 있다.

김녕 서쪽은 제돌이(돌고래)를 방류한 목지곶과 동쪽은 성세기 해수욕장 너머 가수곶이 있다. 그리고 두 코지(곶) 앞에 마을이 있고 그 앞바다에 ‘농괭이 바당’이 있는데 이는 제주 돌고래의 일종인 ‘상괭이들이 노니는 바다’이고 그 안에 작은 섬 바위(여汝)들이 있다. 그 안에 ‘고래수’라는 움푹 팬 데가 있는데 멸치 떼를 쫓아온 고래가 갇혀 죽어서 고래수가 되었다.

철종 1년(1848년 갑인년) 12월, 고래가 죽자 제주목(목사:장인식)에서는 “기름을 짜서 관에 바치라”고 해 해체 후 기름을 짜서(관7:3민) 바쳤는데 양이 부족해 이장·동장들이 구속되고 벌금(십만냥)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벌금이 과중해 입산봉 굼부리 마을소유인 논 약 2만평을 강태정(조천리거주)씨에게 팔아 빚을 갚고 현재는 4번째로 김녕리 김두진씨 소유가 됐다.

유채꽃 밭에 파묻힌 삿갓오롬은 산벗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필자는 ▲김두진 씨의 안내로 삿갓오롬 굼부리에 있는 농장을 방문해 살펴봤다. 봉화대가 있었다던 문장봉 앞(동남쪽)에는 문장지라는 못이 있는데 이전에 북제주군에서 돌을 박아서 못을 보존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종려나무와 무궁화 꽃길이 이채로운데 비닐하우스에서는 각종 밀감들이 자라고 있었다. 농장은 오롬 안이라 태풍이 불어도 안전해 보인다. 

삿갓오롬 굼부리의 형태를 보니 서귀포 하논분화구와 유사한 ‘미르형’으로 보인다. 본래 이 굼부리 안에는 문장지 라는 물이 있어서 논밭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천수답으로 이용하는 논밭에 물이 부족해서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삿갓오롬은 중앙에 둥그런 분화구와 화산이 쏘아 올린 흙 기둥이 성을 쌓은 것 같다. 산상은 둘레 길을 따라 돌아보니 온 산이 무덤으로 덮여 있다. ▲제주에는 조선말까지 25봉수, 38연대가 오롬에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망(望)동산이었다. 그러나 조선 패망 후 일제는 불을 켜고 제주를 지키던 산자의 망(望)오롬을 망자(亡者)들의 망(亡)오롬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지난 봄, 이 오롬을 탐방할 때는 산 아래 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데 삿갓오롬 동북쪽으로는 마침 하얀 산벗꽃이 곳곳에 피어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오롬 동쪽으로는 수풀이 우거졌는데 다른 곳 제주 해변의 오롬들과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 무성하다. 참식나무·후박나무·사스래피·곰솔 등과 해변에 많은 천선과 같은 낙엽수도 섞여 있다.  

▲굼부리 안에서는 건물을 지으려고 정리하던 중, 고대유물들이 발견됐다. 서울대 박물관 팀이 조사로 삿갓오롬에서 출토된 돌괭이·공이·갈판 등이 출토됐다. 인근의 ‘괴내기굴’에서는 주전 500여 년까지 고대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판명됐는데 이들은 오롬굼부리 안에서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이런 사실은 1990년 8월 17일자 제민일보에 수록됐다.  

오름 서쪽 괴내기굴은 마을제(돗제)를 지내던 돌제단도 있다. 김녕은 제주 동촌에서 제일 오래고 큰 마을로 매년 돼지를 제물을 삼아 마을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즉 김녕마을의 선인들이 살던 곳이라서 그만큼 신성시됐다. 그래서 세계자연유산 본부는 이곳에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