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1100고지 탐라각 휴게소서 바라보는 이스렁(嶺)

쿠노Koonoh 2023. 2. 14. 20:14
뉴제주일보 승인 2023.02.09 19:03
1100고지에서 바라 본 기와지붕 같아 보이는 이스렁 모습
 

제주~서귀포 간 한라산 서쪽의 제2 횡단도로 북쪽은 어리목, 남쪽은 영실 등산로 입구가 있고 그 도로 최정상 중간지점에 탐라각 휴게소가 있다. 여기에는 산악인 고상돈 기념비와 흰 사슴 동상도 있는데 제주도에서 제일 높은 도로이며 한국에서도 가장 높은 도로이다.

1100고지 탐라각 휴게소 앞에 서면 사시절 언제 보아도 환히 트인 공간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한라산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봄에는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숲, 여름에는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진록의 물결, 가을에는 붉게 물드는 단풍과 겨울의 상고대를 보고 나면 제주의 그 어떤 곳도 감흥이 없을 만큼 바라보는 풍광은 비길 수 없는 천상의 아름다움이다.

1979년 12월 흰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필자는 한라산 제2 횡단도로 상 제주를 지나 서귀포로 가던 때를 잊지 못한다. 45년 만인 2023년 1월 눈 내린 한라산을 다시 찾았지만 통제돼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다시 제2 횡단도로를 찾았다. 눈이 녹아버린 모습에 실망하던 때 나타나기 시작한 상고대는 흰 눈이 쌓인 것보다 더 황홀했다.

2023년 1월 북극을 감싸던 한파가 느슨해지면서 전 세계를 덮쳤다. 영하의 날씨가 없던 제주도마저 영하 4도까지 내려가는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한라산은 순백의 상고대가 꽃을 피웠는데 관광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다. 그 설국에 기와집같이 가운데 우뚝 솟은 곳이 바로 이스렁인데 상고대 속의 그 모습은 마치 천상의 집과 같다.

이스렁(재嶺)은 광령리 산183-1번지, 어스렁(재嶺)은 광령리 산183번지로 모두 선작지왓 고원에 연이어 있다. 이스렁은 해발 1352.6m, 어스렁은 1332.4m다. 비고(산 높이)로 보면 이스렁은 73m, 어스렁은 37m로 오롬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 두 재(嶺)는 모두 한라산국립공원 내 소재하고 있는데 지금은 탐방로가 폐쇄돼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1100고지 탐라각 앞에 서면 한라산 동서남북을 확실히 가름할 수 있다. 탐라각을 기점(基點)으로 보면 이스렁 앞쪽(東)으로는 날씨 좋은 날이면 한라산 왕관릉까지 훤히 보인다. 왼쪽(北)으로는 누운 듯이 넓적한 망체오롬이 보이고 오른쪽(南)으로는 영실기암 건너편의 볼레오롬이 보이고 바라보는 1100고지 탐라각은 한라산 서(西)쪽이 된다.

1100고지에서 어스렁으로 가려면 장오롬→왕오롬을 거쳐서 숲 동남쪽으로 갈 수 있고 어스렁에서는 동북쪽으로 향하면 이스렁으로 갈 수 있다. 영실 쪽에서는 볼레오롬 서북쪽으로 이스렁을 거쳐서 더 나가면 어스렁까지 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탐방로조차 찾기 어렵다.

어스렁의 어원·유래에 대해서는 아직껏 전해진 바 없다. 다만 사전에서 보면 한국어에서 ‘어스’는 ‘굼뜨다’, ‘어슷하다’, ‘비탈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어스렁은 어슷한 재(嶺)라서 어스렁이라 한 것 같다. 이스렁에 대해서도 아직은 알려진 바 없으며 어스렁은 이스렁으로 나가는 37m의 낮은 언덕이다. 굳이 오롬으로 분류하면 원추형 오름이다.

또한 뾰족한 데 없이 봉긋한 언덕이라서 어스렁(재/령嶺)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주 오롬을 네 가지 형태(원추·원형굼부리·말굽형굼부리·복합형)로 구분한다면 이 오롬은 재(嶺)로 보기에는 당연히 굼부리도, 복합적 화산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스렁의 몽골어 이스(ИС)는 ‘안감이 없는 어두운(짙은)색 비단, 검댕이, 그을음’을 뜻한다. 또한 ‘렁’은 한국어의 고갯마루인 재(령嶺)로중 국어 발음으로는 링(ling), 또는 령嶺의 제주어 발음으로 본다. 더 나가서 목동의 제주어인 테우리같이, 지다리(곰 종류로 가장 작은 오소리의 제주어) 같이 어슬렁거리며 가는 것을 비꼬듯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30여 년 전 제주 오롬의 선구자인 김종철은 그의 저서(오름 나그네2)에서 이스렁에 대해 “질 푸른 숲의 바다에서 물너울처럼 첩첩 산릉이 일렁 거린다….” 하였듯이 한여름 이스렁은 안감 없는 짙은 색 비단처럼 질 푸르다. 다른 한편, 김종철은 어스렁을 이스렁의 와전으로 보는데 이스렁과 어스렁은 실제로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두 개의 오롬이다.

어느 해 가을, 골짜기를 따라 이스렁으로 오르는데 고산식물인 시로미들을 만났다. 시로미는 한대성 고산식물로 백두산과 한라산에서만 자생하는 멸종위기 식물로 정해질 만큼 귀한 식물이다. 탐라각 쪽에서 보면 이스렁은 숲속의 오름인 것 같으나 두 개의 골짜기를 이루는 물이 북서쪽은 천아오롬 쪽으로 한 줄기 흐르고, 남쪽은 볼레오롬 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동남쪽은 초원을 이루고 있는 이스렁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아름다운 제주 오롬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