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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

쿠노Koonoh 2020. 3. 1. 15:43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5)

 

고난을 통한 감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이 그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고도 말합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는 예수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중요 명제입니다. 그렇지만 그 명제를 늘 염두에 두고서 실행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부실하고 공허하여 힘든 삶이 계속되는 이유는 고난과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에게 넘쳐나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위로 가운데 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한국 땅에서 새봄의 기운이 약동하는 때가 3월입니다. 3월에는 학교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고, 상급학교에도 입학합니다. 오늘 31일은 주일이면서, 한국역사에서 1919년 기미년에 민족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뜻 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구한말의 역사와 일제시대의 36년 동안은 이 나라의 백성에게 한없는 고난의 때였습니다. 과거에 잘못한 게 있었으므로 심판과 징계의 차원에서 빚어진 역사과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환난 후에 받는 위로를 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비와 위로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한 목적에 있지 않습니다. 자식을 징계하지 않는 아비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는 자식이라면 그는 관심 밖의 사생자와도 같을 것입니다. 현대교육과 문화사상에서 매우 위험한 것 한 가지는, 인권과 자율이라는 대표적 특성입니다. 인권과 자율, 얼마나 소중한 단어입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권리를 인정받고 자기 삶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은 너무도 바람직합니다.

모든 문제는 근저의 의식여하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좌우됩니다. 인권과 자율을 하나님의 창조의식에서 이해하는 사람과 무신론적 사상에서 주장하는 사람의 결과는 완전히 상이합니다. 전능하고 거룩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심령에 모시지 않는다면, 모든 지혜와 지식이 영원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생에 전제되지 않으면 허무한 삶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복음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온전히 투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는 것이 바울의 전제적인 고백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가지는 고난을 함께 포함합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과 가르치심을 통해서 영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하고도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따른 결과는 영원한 소망과 위로와 힘입니다. 세상의 고난에도 유익한 결과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불완전한 것들로서, 언젠가는 남에게 빼앗기거나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오는 소망과 위로는 금생과 내세에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함이 없는 샘물에 비유하면 웬만큼 적합하겠지요. 그토록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기에, 삶의 과정에서 오는 어떤 고통도 참된 위로를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로가 넘친다고, 바울 사도는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어떤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가 계십니까? 건강, , 이성, 학업, 취직, 진급 등등, 어떤 문제로든 갈급하게 해결책을 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가지도록 기도하십시오. 병들고 시드는 나무를 살리려면 뿌리부터 살펴 처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를 알지 못한 채 얕은 처방으로 부적 붙이듯이 하면, 그 인생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습니다.

 

(202031,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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