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주의 디카시 오롬스토리

달산봉이라 잘 못 알려진 하천리 오롬

쿠노Koonoh 2025. 3. 28. 08:54
삼다일보 승인 2025.03.20 17:39
번영로에서 본 돌오롬
 

돌(ㄷ+아래아+ㄹ)오롬은 제주시에서 번영로를 타고 갈 수 있는데 하천리 초입에 있으나 눈여겨서 보지 않으면 ‘휘~익’ 하고 지나쳐 버릴 만하다. 돌(ㄷ+아래아+ㄹ)오름은 표선면 하천리 1043번지 소재하며 해발 136.5m, 비고 87m의 오롬은 동네에서는 망오롬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말은 이 오롬이 들판 가운데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오롬 일대의 들판이 개척된 것은 몽골에서 이민자들이 제주도로 이민 온 후라고 볼 수 있다.

제주도는 700여 년 전 충렬왕 20년(1276) 때부터 몽골의 행정관료와 군사 1400여 명과 왕족들, 유배자 170여 명이 제주로 온다. 공민왕 때(1374)는 이미 1만2300명 농목(農牧) 이민이 제주를 낙토로 여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은 원(元)나라 11성(趙·李·石·肖·姜·鄭·張·宋·周· 秦·梁)과 운남(雲南)을 선향(先鄕) 삼는 3성(安·姜·對)과 다루가치로 온 좌(左)씨를 합해 15개 성씨다.

필자는 만주에서 20여 년을 거주하며 방학 때마다 내몽골지치구(省級)를 자주 탐사했고, 외몽골(몽골공화국)에서도 한 학기를 지내며 제주문화와 비교 연구하였다. 제주 오롬은 만주 벌판이나 몽골 초원의 오롬과 아주 유사하다. 만주·몽골에서도 작은 산을 ‘올(ㅇ+아래아+ㄹ)/오(ㅇ+아래아)리’라 하고 산맥과 연결되는 곳은 ‘노로’라 했다. 그리고 짐승들의 망을 보던 곳은 ‘어워’라고 하는데 ‘어워’는 ‘쌓다’라는 뜻으로 몽골 목자가 목축을 망보던 곳으로 제주 테우리(목자)들이 돌을 쌓는 ‘어음’은 비슷하나 샤머니즘적 요소도 있다는 것은 한국의 성황당과 비슷하다.

돌(ㄷ+아래아+ㄹ)오롬은 아직까지 달산봉이라 부르나 이는 잘못된 말이다. 훈민정음이 한글로 변하며 아래아가 사라지며 돌(ㄷ+아래아+ㄹ)은 달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달은 밤에 뜨는 달이 아니라 들판을 말하는 순수한 제주어이다. 고려시대 망동산은 소나 말을 보던 곳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외적을 감시하는 봉화대가 생겨나며 그 이름도 변하게 되었다. 조선조 1841년(헌종 7)부터 2년간 제주 목사로 재임했던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만 해도 돌(ㄷ+아래아+ㄹ)오롬은 달산(達山)이라고 표기했으나 이후 달산에 봉화대(烽火臺:봉수대)가 설치되며 달산봉(達山烽)이라 불리게 됐다.

하천리 웃동네에서 본 돌오롬

달산봉화는 정의현청(성읍) 인근의 남산봉화로 직결되고, 동으로는 독자봉화(성산읍)와 교신하고 서로는 토산봉화(표선면)와 교신했다. 오롬 정상에 있는 봉화대는 달산만 아니라 제주도 모든 봉화대가 그렇듯이 봉화를 올리던 봉화대 탑신은 일제시기에 모두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탑신이 있던 흙무더기는 마치 오롬새끼처럼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달산 봉화대에 올라 우측을 보면 숲 사이로 표선 앞바다와 백사장, 해변의 호텔들도 보인다. 좌로는 일출봉과 우도, 수산봉수대가 있는 큰머리오롬까지 보인다. 돌오롬의 훼손은 이뿐만 아니다. 달산의 훼손도 제주도의 다른 오롬들처럼 훼손이 심하다. 밑에서 바라보면 왼쪽 유방이 잘리어 복부까지 누렇게 파였다. 망자亡子는 중턱에 누웠으니 북쪽 찬 바람을 막고 남향 햇살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얼마나 좋겠는가! 북망산이라던데 여기를 보니 남망산이다.

제주도 오롬들 중에 돌(ㄷ+아래아+ㄹ)오롬처럼 질 좋은 목재가 자라는 곳도 많지 않을 것이다. 굵은 곰솔이 쭉쭉 뻗었는데 아파트 3층 높이다. 둘레를 재보니 대부분 ‘한 아름이 넘고 언 듯 재어보니 185㎝ 쯤이다. 아마도 1960년대 초반 녹화된 것이리라. 김종철씨는 ‘오름 나그네’에서 “예덕나무가 유난이 많다고 하지만 낙엽수는 목재로 쓸 수 없는 천선과와 팽나무 뿐이다”라고 하니 지금의 상황이 30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곰솔이 대부분이고 상록수로는 후박·아웨나무 속에 5~6년쯤 되어 보이고, 사스레피·구럼비나무가 햇살을 잡으려고 휘청거린다.

김종철씨은 당시에 “가시나무가 많았다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라고 하는 데 불과 30여 년 전 탐사했는데, 이렇게 다를까? 혹시 다른 오롬을 말하나 싶다. 정상에서 내려와서 둘레 길을 돌아 나온다. 1960년대 정부는 목초지에 방애(불)을 금지 하고 나무 심기를 강요하였다. 불과 60년 전이다. 필자의 어릴 적 2월이면 산과 들에 ‘방애불’타는 걸 늘 봐왔다. 이제는 방애불도 전설이 되어버렸다. 새별오롬에서 ‘들불축제’란 이름으로 재현되다가 그마저 사라질 위기다.

돌(ㄷ+아래아+ㄹ)오롬 우측으로 바라보면 표선 앞바다와 백사장, 해변의 호텔도 환히 보인다. 좌로는 성산포 일출봉과 우도섬, 그보다 멀리로는 시흥리 수산봉수대가 있는 큰머리오롬까지 보인다. 봉화를 올려볼까? 날 찾아올 님이 있을지? 북동쪽으로 나가면 제석동산이다. 지난봄, 산길에는 산딸기들이 하얗게 꽃 피어 오롬 둘레 길을 덮었다. 이제 곧 산딸기 꽃 필 때가 됐다. 어느 여름날 다시 다시 와서 이 산딸기를 따 먹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