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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맛을 잃으면

쿠노Koonoh 2022. 9. 4. 15:42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누가복음 143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를 절대로 신봉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그는 올바른 판단으로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본문에 언급된바, 소금이란 짠맛을 내는 천연물질입니다. 그런데 짠맛을 잃는다면, 이미 그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본문의 내용은 논리가 정연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 가지의 핵심적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신앙, 지혜로운 믿음, 믿음의 본분을 이행하는 삶, 이 세 가지를 올바로 갖춘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무식하고 비인간적인 처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면, 당연히 지켜져야 할 원칙입니다.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풀고 가야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만유 주 여호와이시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와 대등하게 견줄 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자녀 등은, 하나님에 비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대상입니다. 가족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교훈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적당한 만큼 믿거나 타협적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사람 사이의 거래 같은 것이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교인은 그런 식의 신앙 태도를 보입니다. 교회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순교자는 절대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지상에 복음이 전해졌고, 한국 교회도 자라났습니다. 희생의 밑거름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절대적 믿음을 계승하지 못한 탓에, 이 시대의 교회는 시들고 병들어 버렸습니다. 소금이 본래 짠맛을 지닌 물질이듯이, 신앙은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를 깨닫고 구원을 받게 하는 길입니다. 그 의미를 모른다면, 믿음은 맛을 잃고 죽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지혜로운 믿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 적과 싸우려는 임금의 두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망대 공사를 할 뜻이 있다면, 규모와 기간에 따른 예산을 정확히 짜야 합니다. 또한 적군을 공격해서 이기려면 신중히 계획해야 합니다. 실패할 것 같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음만 못할 테니까요. 예수를 따르는 믿음은 절대성과 아울러, 실행의 삶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부흥회 자리에 참석한 사람이 감동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그에 따라 무언가를 서원했습니다. 부흥회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축 처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고백하고 서원했던 것을 실행하려니 그만 힘겨움을 느껴, 어느새 신앙을 외면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번씩 중단하고 포기하더라도 시련의 과정은 그 나름대로 유익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점까지 감안(勘案)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인도하십니다. 야고보서 1:2~4, 베드로전서 4:12~19 등 여러 곳에, 주어지는 모든 고난을 기쁘게 여기라고 교훈했습니다. 고난의 극치를 겪은 욥의 경우를 보면, 고난 후에 더욱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리스도 신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앙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이론 자체만은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곧 삶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면서, 깨닫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야 하고 설탕은 단맛을 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 믿음은, 한마디로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융통성이란 생활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지, 절대 신앙에 대한 타협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경외의 지혜, 생활의 지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지혜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따라서 자신의 사명을 이행해야 합니다.

 

(202294, 예수제자원 예수제자교회 Koonoh쿠노 오호택 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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